붉은빛을 머금은
글 | 정서연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SPACE298의 진종환 개인전 《붉은빛을 머금은》은 비가시적 대상에 대한 순수한 감각을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사유가 담겨 있다. 이것은 단박에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이미지지만,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계절의 변화를 관찰하며 감지한 시각 외의 감각을 시각화하고 있다.
진종환은 일출과 일몰, 바람이 부는 방향, 온도의 변화와 같은 추상적 대상을 탐구해 오고있다. 작가가 다루고 있는 대상은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추고 있지 않고, 그 대상이 막연하다.일출과 일몰의 차이는 해가 어둠에서 나오는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지에 대한 것이고, 바람이부는 방향은 그것을 감각 하는 대상이 서 있는 위치와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 온도의 변화 또한대상의 차고 더운 정도를 피부가 물리적으로 감지하는 것이다. 작가가 다루고 있는 대상은보편적으로 누구나 아는 것이고 느낄 수 있지만, 그 실체는 구체적이지 않고, 주관적이며,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대상화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적으로 끌어오는 행위를 한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구름〉(2024)과 〈밤바람〉(2024)은 바람이 부는 방향이나 움직임을 관찰할 때 느낀 촉각적감각을 표현한 작품이다. 감각으로부터 발현된 이미지는 수평적이거나 수직적이며, 촘촘하거나길고 넓다. 이미지가 대상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오로지 여러 붓질로 만들어진 이미지와 덧붙여진 제목을 단서로 자신이 느끼거나 경험했던 촉각적 환상을 떠올리게 된다. 관객은그의 작업으로 하여금 제목에서 지시하는 대상과 이미지 사이의 심미적 간극을 해석하게 된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인 계절, 바람, 시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봄, 여름, 가을,겨울의 시작과 끝을 규정할 수 없고, 불어오는 바람은 어디에선가 불어오고 어디론가 날아간다.어디서부터가 시작이고, 어디까지가 끝인지 알 수 없는 형체는 그저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을뿐이다. 작가는 정지시키거나 붙잡아내기 힘든 찰나의 ‘감’을 표현하기 위해 마르지 않은 유채물감 위로 물감을 덧입혀 순환하듯 획을 이어나간다. 작가의 붓질에서는 연약하고 소박한 개인의사색을 비롯하여, 정확하고 힘찬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작가의 출향 도시인 포항의 풍경에서 경험한 감각적 인상을 중심으로소개된다. 전시의 대표 작업인 〈붉은빛을 머금은〉(2024)은 너비 4.6m가량의 광활한 크기의일출과 일몰의 인상을 담아낸 것으로, 작가가 유년 시절 포항에서 경험한 기억과 감각을 회상하여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에서 작가는 어떠한 장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거나 한정하지않는다. 작가는 관람자에게 자신이 경험한 시간과 감각만을 단서로 제시하여, 직접적인 독해에노출되어 장소를 ‘재현하는’ 회화를 탈피하고자 한다. 이러한 이유로 작가에게 장소성을 지우는일은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진종환은 작품이 보는 이로 하여금 경계 없는 메타포의 장소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기억속 풍경의 장소성을 지워낸다. 풍경에서 기억한 대상을 형상으로 정형화하지 않고 소거하여,그것을 그려낸 태도만을 남긴다. 그렇게 태도만이 남은 풍경은 어떠한 규범이나 상징으로 규정된물리적 공간이 아닌 순수한 감각 그 자체로 존재한다. 비로소 이 풍경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무한한 풍경으로 자리한다. 작가는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이 과거에 감지한 풍경과미래에 다가올 풍경 사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현재의 풍경을 오롯이 바라보게 한다.
계절은 순환한다. 그렇게도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가을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새삼손끝에 닿은 시원한 바람을 통해 느낀다. 그리고 또 겨울도, 봄도 올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 변화는 보이지 않을 것이고, 보이지 않는다면 느끼지 못할 것이며, 느끼지못한다면 무감각해질 것이다. 계절을 놓쳐버리는 것과 계절이 지나가는 것이 다름을 알기에,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는 동안 작가는 계절의 길목에 서서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 시간을고이 붙잡아 화폭을 어루만진다. 진종환의 《붉은빛을 머금은》은 무감각해진 삶 속 계절의변화를 구체적인 감각으로 현시하여 구축한 그의 미적 언어를 현현하고 있다.